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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운명

박애란 작가

박애란기자 | 입력 : 2018/02/04 [23:37] | 조회수 : 274

 

▲     © 시인뉴스 초록향기



1968년 음력 8월 5일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백화점 양품점으로 연락이 왔다. 병환을 얻으신지 1년만의 일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 못하면서 정신없이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버스에서 어떤 아줌마가 ‘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슬피우니?’ 하고 물었지만 우느라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우리집에는 불이 환했고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이웃사람들이 보였다.
이때의 장면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나보다.
그후 우리집 근처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기만 하면 가슴부터‘덜컥’ 내려앉고는 한다.

마루에 아버지를 모셔놓고 영정을 세워 놓은 후 향을 피워 놓은 것이 보였다.
신을 내동댕이치듯이 벗어 던지고는 그 앞에 엎어져서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태어나서 가장 슬픈날이었다.
그런데 한참을 울다보니 배가 몹시 고팠다.
슬픈 것과는 상관없이 배가 고플 수 있는 현실이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아버지께 죄책감이 느껴졌으나 배가 너무 고팠던 나는 어쨌던 부엌으로 들어갔다.
미리 동정을 살펴서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였다.
최소한의 ‘달그락’ 소리로 무채나물과 함께 미쳐 씹을 새도 없이 밥을 구겨넣고 있을 때였다. ‘어’ 하며 누가 들어왔다.
그만 이웃집 아줌마한테 들켜버린 것이었다.
순간 어찌나 부끄럽고도 민망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밥이 넘어가니 넘어 가’
아줌마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셨을 것이다.
평소에 별것 아닌 일에도 마음 쓰여서 밥부터 못 먹는 내가 그런 충격과 슬픔 가운데 배가 고팠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잘생긴 용모에 넥타이를 맨 신사복 차림이었던 생전의 아버지는 농사를 짓고 있는 동네 아저씨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단정한 멋쟁이였다.
키는 보통이었고 분위기가 꼭 탈렌트 이순재씨처럼 잘 생기신 아버지는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부르셨다.
머리가 좋은신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는 무슨 건축자재인가를 발명해서 유명해지기도 하셨다.
그 시절에는 장안의 한량으로 여배우하고도 사귀어서 내 이름을 그 영화배우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반찬은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서 배추김치를 얹어서 잡수시는 것으로 그때 아버지가 드시는 모습은 너무도 맛있어 보였기에 내가 입맛을 다시고는 했다.

아버지가 주무실 때는 동네사람들이 아버지의 코에다가 손을 대 보고는 했다는데 너무도 곱게 주무셔서 ‘돌아 가셨나’ 해서란다.
집에 계신 동안만큼은 아내에게나 자식들에게 자상하셨던 아버지는 커다란 생선을 사가지고 와서 당신이 손수 다듬기도 하시고 명절 때면 자그마치 여섯이나 되는 우리들의 세타와 골덴 바지 등을 사다 주시기도 하셨다.
엄마는 아버지가 자식들이라면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하셨다고 하였다. 그런 아버지가 왜 그렇게도 가족들에게 무책임하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시고 청소년 시절부터 목수일로 잔뼈가 굵으신 아버지는 한자 실력은 좋았으나 글씨체는 별로였다.
자그마한 소품 하나를 만들어도 반듯하면서도 탄탄하게 만드셨던 아버지의 친구들은 목공일을 할 때 필요한, 엿가락같이 생긴 아교, 끌, 대패, 톱, 망치, 먹줄통, 줄자 등이었다.
목공일을 하실 때의 아버지의 귀 뒤에는 연필이 꽂혀있고는 했다.

아버지가 서울대 농대 축산과 부속 목장의 콘센트 건물 안에 있는 책상과 의자를 고칠 때는 언니와 내가 따라가서 논적도 있다.
언니는 6학년, 내가 3학년 때였다.
얼룩소, 돼지, 닭등을 구경하는가 하면 클로버와 냉이의 하얀꽃을 따기도 했다.
어찌 보면 멍청해 보이고 어찌 보면 선해 보이는 커다란 눈의 황소는 풀을 씹다가도 이따금씩 엄마가 보고싶은지 고개를 쳐들고는 ‘음매’하고, 어른인데도 엄마를 찾고 있는가 하면 침을 ‘질질’ 흘리며 서 있었다.
온몸이 울그락 붉으락 주름살로 덮여있는 칠면조는 꼭 마귀할멈이었다.
그렇게 무식하게 생긴 새는 처음 보았다.
울음소리는 또 얼마나 호들갑스러운지 한참 놀이에 빠져있는 언니와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부부의 정이란 무엇일까?
언젠가 엄마가 매산시장에 있는 한 식당에서 주방일을 봐 줄때의 일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색시집이었는데 엄마는 당신이 비록 주방의 허드렛일을 하고 있더라도 손님에게 술과 웃음을 파는 여자들과는 격이 다름에 긍지를 가지고 계셨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던 엄마였다. 엄마에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 간 내게 용돈을 주려고 고쟁이 속주머니를 뒤지는데 무언가가 ‘툭’하고 떨어졌다.
안 보여 주려는 엄마와 실갱이를 하여 빼앗아 펴보니 그것은 아버지의 편지였다.
‘고생하는 당신에게’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편지는 엄마가 어찌나 많이 보았는지 다 낡아서 ‘너덜너덜’ 했는데도 엄마는 그것을 소중히 접어서 다시 간직하셨다.
엄마를 부를 때 ‘임자’하고 은근하게 부르시던 아버지는 그 당시 걸핏하면 살림을 때려 부수고 아내를 개 패듯 하던 이웃집 아저씨들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틀린 분이었다.
평소에는 물론이고 술을 드셨을 때도 자식들에게 흐트러진 구석을 보이는 법이 없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긍지를 느꼈고 이웃집 아이들에게 상대적인 우월감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보다 더 멋있는 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러나 애석하게도 아버지는 가정과 가족보다는 여자와 도박을 더 좋아하신 분이었다.
그러니 엄마는 아버지가 ‘반짝’정신을 차릴 때는 괜찮지만 그러지 않을 때는 늘 생계의 위협을 받고는 하셨다.
과정이 성실했으면 설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잘,잘못을 따져서는 안될 것이다.
아버지가 책임을 다하셨는데도 우리가족이 고생을 했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아버지가 만일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였다든지 하는 대의명분이 서는 고생이면 얼마든지 자부심을 갖고 고생을 낙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헌데 내 아버지가 도박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늘 부끄러웠고 자존심이 끝간데 없이 추락하곤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키우면서 자랐다.
그만큼 당시의 엄마가 불쌍했고 아버지가 미웠던 것이다.
아이들은 자그마치 여섯이나 되는데 생활비는 꿩 구어 먹은 소식이니......
그렇다고 물만 먹고사는 금붕어도 아니고 참으로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엄마는 자식들의 입에 풀칠을 해 주려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고 그것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었다.
'도대체 여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죄인가'
이말은 늘 고생의 도가니 속에서 살았던 엄마에게 어린 내가 몇십번을 되뇌이던 말이다.

부모의 원만한 결혼생활이 아이들에게 좋은 모델이 되는 것인데 결국 불안하기 짝이 없게 유지되던 엄마의 결혼생활은 내게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일찍부터 내 사전에서 결혼이란 말을 빼 버렸기에 한창 때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결혼과 연결시키지를 못했다.

하루는 아버지가 ' 왜 다른 집 애들은 밥을 조금씩밖에 안 먹는데 우리 집 애들은 많이 먹느냐’고 불평하시니 엄마는 ‘다른 집 애들은 수시로 간식을 먹는데 우리 집 애들은 밥밖에 더 있어요?’하고 우리를 두둔해 주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여섯형제 벌어 먹이기가 허리가 휘셨나보다.
그래도 그렇지 엄마는 매일매일 손발이 다 닳도록 힘들게 일을 해서 자식들에게 당신의 생피를 짜 먹이다시피 하셨다. 어쩌다 착실해 지셨던 아버지가 엄마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아닌것 같았다.

권위적이고 다분히 미신적인 아버지는 우리들이 당신 어깨 스치는 것을 굉장히 터부시 하셨다. ‘재수가 없다’고
우리들이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심히 스쳤는데 아버지가 ‘벌컥’ 화를 내시는 모습을 여러번 뵌 우리는 아버지를 굉장히 어려워했다. 아버지 앞에서는 밥도 잘 못먹었다.
다른 아이들이 아버지한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을 보면 너무도 부러웠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 가신후 언니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아버지께 어리광을 부릴줄 모르고 어렵게만 대한 것을 몹시 서운해 하시더란다.
진작에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고 아버지께 죄송하게 생각 됐으나 어른이 먼저 마음문을 열기 전에야 아이들이 어떻게 권위로 탄탄히 무장된 그 속으로 들어 갈수 있겠는가

내가 아직 백화점에 근무하기 전의 일이다
병환으로 아랫목에 누워 계신 아버지는 내가 6학년때 받은 경기도지사가 표창한 선행상을 당신 보시기 좋은 위치의 벽에 걸어 놓게 하시고는 늘 보고 계셨다. 윗목에다 밥상을 펴놓고 앉아서 혼자 한자공부를 하고 있던 나는 아버지가 원하시면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는 했다.
아버지의 다리는 이미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니까 무조건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눈물이 났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버지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병환을 얻으신 후에야 도박에 빠졌던 지난날을 후회하시며 다시 건강을 얻으면 열심히 사실 것처럼 말하셨지만 아버지의 곁에는 벌써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실현 불가능한 소망을 말하는 아버지께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이 울고 있는데 서둔야학 선생님들이 여러분 오셨다.
이미 졸업을 시킨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졸업생이건만 어떻게 아셨는지 선생님들이 찾아오신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도 다 쓰러져 가는 흉악한 몰골의 초가집이 부끄러웠다.
선생님들은 차례차례 아버지의 영전에 절을 하시고 여러 가지 일을 돌보아 주셨다.
야학 후배들의 선생님인 B씨가 붓글씨를 잘 쓰기에 조의금 들어온 것을 접수받았는데 ‘보리쌀 2되’라고 적는 것을 보니 또 새삼 부끄럽고 비참해 지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보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 참담한 가난이 야학 선생님들께 샅샅이 드러난 날이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이 뿌리채 흔들려 버린 잊지 못할 날이었다.
살아 계신 동안도 별로 아버지의 덕을 보지 못한 엄마는 새삼스럽게 넋두리를 하셨다.
‘아이고 나는 애들하고 어떻게 살으라고............’
'엄마 우리가 언제는 아버지 덕에 살았나요?'

정신없이 우는 가운데 아버지의 삼일장이 끝이 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우처럼 살갑고 믿음직한 사람들이 또 어디 있을까?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빈 껍데기 살림에 막막하기만 한 우리를 전적으로 도와서 장례식을 무사히 치루게 한 분들은 서둔교회 교인들이었다.
살아 생전에 정신을 못 차려서 자식들과 아내를 말도 못하게 고생시키셨지만 남은 가족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고 가신 아버지였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그래도 믿을 곳이라곤 교회밖에 없으니 애들 데리고 교회에 나가라'는 말을 엄마에게 남기셨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도 '교회 착실히 다니고 절대로 나쁜 길로 빠지면 안된다’고 하셨다.

혈육의 정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당신 살아 생전에는 내가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하고 어리광 한번을 부릴줄 몰랐는데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가 너무도 그리웠다.
아버지께 꼭 한번만이라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어쩌다 꿈에 나타나시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게 기쁜일만 생기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하실까’하는 아쉬움이 무척이나 컸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이 동요가 들릴 때마다 아버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글을 쓰다보니 나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만한 갈등과 미움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게 됐다.
우리아버지도 인간이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약한 것이다.
아버지라고 왜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젠 아버지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게 됐는데 이렇게 되기까지는 4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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