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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조건 외1편 / 천수호

정유진기자 | 입력 : 2019/08/15 [20:08] | 조회수 : 245

 

▲     © 시인뉴스 Poem



대화의 조건

 천수호

 

 

강물 위에 얼음이 무슨 말들을 새기고 있다

물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잔뼈가 너무 많다

내가 너의 말을 듣는 방식이라 했다

그것이 결빙에 대한 너의 해석이니까

얼음에 걸려든 지푸라기라든가 잔돌이라든가

이것들이 우리 대화의 오브제였다

잘 살았다든가 헛살았다든가 이런

디테일한 사건들은 원래 얼음의 수명과는 관련이 없다

저 수압 속에서 물고기가 살았다거나 죽었다거나 하는 그런 공방도

처음부터 빙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수십 년 반복된 해빙과 결빙은 수위(水位)와는 별개여서

얼음을 이루는 조건은 늘 따로 있었다

극한기의 얼음은 발이 따뜻한 다족류가 건너가도 단단하기만 하다

얼음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말을 듣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내가 네게 말할 때의 순한 방식이라 생각했다

얼음을 녹였다가 얼렸다가 하는 것만으로도

대화의 오브제는 단순해져가고

빙판은 잔뼈만 프린트해두기로 한다

잔해라는 말을 남길 수 없는 깊은 결빙

이미 한 덩어리인 동절기였다

 

 

 

 

 

 

 

 

 

 

 

 

아침이라는 영정사진

 

 

푸르스름한 수염으로 그가 왔다

왔다지만 오지 않은 듯 사진 속에서만 웃고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세상에 여태 살아왔지만

간혹 가래침을 맞는 영상이 뜨기도 했다

멱살이 잡히는 장면은 뉴스감이 되지도 못했다

암청색 바탕화면에 검은 형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침은 그런 것이다

주검으로 정지되었던 사물들이 창을 내고 빛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런 영상은 매일 볼 수도 있지만

한번 죽은 오늘 아침은

내일 그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단단한 사각 틀 안에 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화면 밖에는 목련이 핀다는 낮은 말이 들리지만

국화향기가 줄을 서는 아침

꽃잎은 빳빳하지만 이 흰 꽃들에게 정규직이라는 꽃말은 없다

사진 안에서만 아직은 싸한 아침 바람이 불어서

옅게 웃는 정지화면

어두운 갱의 일터로 수그리고 들어갔던 어젯밤은 이제 기록이 되었고

어제의 아침은 오늘 아침보다 하루 먼저 죽었다

 

 

 

 

 

      

 

 

프로필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민음사 아주 붉은 현기증, 문학동네 우울은 허밍
삶의향기 동서문학상 운영위원

횡성 예버덩문학의집 운영위원

문화예술협동조합 몽상 대표

명지대학교 겸임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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