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감꽃 지다 / 주영국

김윤환의 시로 듣는 인생 에세이(20)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10/06 [21:38] | 조회수 : 122

 

▲     ©시인뉴스 포엠

 

 

 

감꽃 지다

주영국

 

예초기 날에 개구리가 날아갔다

잘린 풀에서는 여자의 냄새가 났다

초경을 시작한 여자 아이의 냄새였다

불행은 예고되지 않아서 더 불행하다

잔돌이 여기저기로 튀고, 수유를

마친 풀들이 어지럽게 잘리며

함께 울며 아우성을 지를 때도

불행은 예고되지 않은 것이었다

풀밭 어디쯤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예초기의 시동을 끄고 떨어진 감꽃을 주웠다

처음부터 열리지 말았어야 할 감꽃

대개의 결론은 살아남은 자들이 낸다

국수를 삶았다며 어머니가 부를 때도

감꽃 두 개가 맥없이 떨어졌다

초경을 시작한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가지 끝에서 떨어지는 꽃이 더

불행하다고 풀들에게 말해 주었다.

 

- 주영국 시집 『새점을 치는 저녁』 (푸른사상사, 2019)

 

시는 언제나 상처가 선명하게 보이는 풍경을 찾아 간다. 상처가 있기 전의 고통을 다시 소환하여 고통의 절정을 관통하여 아득한 인연(因緣)마저 해체하고 그 풍경을 감싸 안는 서정의 순환기능을 갖고 있다. 이 시는 마치 성묘의 현장에서 예초기에 희생당하는 풀들의 장례식을 보는 듯한 풍경이다. 편익성과 힘이과시하는 소음과 칼날에 저항하지 않는 작은 생명들이 보인다. 잘려진 풀들에서 ‘수유를 마친 풀들에게서 초경의 딸’이 보이고, ‘떨어진 하얀 감꽃’에서 ‘어머니의 하얀 머리’와 ‘딸의 시간’이 교차되는 것을 시인은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들의 인생도 무서운 날과 굉음으로 잉여를 제거하는 편익을 쫓는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잘 보이는 것들에 복종하는 잘 안 보이는 것들의 눈물을 발견하게 한다. 이처럼 시인의 서정성은 돌이킬 수 없는 것들마저 소환하여 시를 읽는 이들의 눈을 감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한다.   

- 김윤환 시인    

 

 

 

 

김윤환_ 1963년 안동 태생, 1989년 『실천문학』둥단,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 『이름의 풍장』외, 동시집 『내가 밟았어』, 논저 『한국현대시의 종교적 상상력』, 『문학의 이해와 글쓰기』 등

  • 도배방지 이미지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