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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월 외 9편 / 고영섭

정유진기자 | 입력 : 2020/10/21 [11:02] | 조회수 : 240

 

  © 시인뉴스 포엠



포월

 


                               고영섭

지렁이 한 마리가 전신투지로

염천의 길 위를 기어가고 있다

일생에 한 번을 순례한다는

수미산 성지로 가는 것일까

머리와 두 팔 다리 헤어진 채로

이 땅의 서러움을 모두 껴안고

 저 땅의 기꺼움을 죄다 껴안고

 포복하며 열어가는 새로운 역사

, 어둠을 뚫고 나와 길 위에다

제 생사를 내맡긴 생명의 보살.

 
 
 
 

 

 - 사랑의 지도

                             고영섭

 

                           

눈앞에 셀 수 없이 널린 길들도

내 정작 마음먹고 나가려 할 땐

너 댓 길 서너 길 두어 길 되다

한 길로 줄어들기 마련이듯이

 

지상에서 제일로 부지런한 건

나의 손과 또 나의 발이라지만

머리에서 가슴으로 못 옮기고선

가슴에서 발끝으로 못 이르고선

 

세상에서 제일로 머나먼 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아가는 길

발끝에서 온몸으로 못 나가고선

마지막엔 자기조차 못 버리고선

 

눈앞에 널려 있는 길들 중에서

마음 둘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나

지상 위에 남겨진 오직 한 길은

내 온 몸을 던져서 열어가는 길.

 

 

 

 

 

 

 

 

 

 

 

 

 

 

 

 

 

벚꽃 사리

                           고영섭

 

 

                                 

겨우내 풍찬노숙風餐宿 이겨내면서

 

무쇠 씹는 마음으로 들었던 화두

 

맛이 없는 참맛을 음미하면서

 

거세게 몰아치던 내면 속의 힘

 

화두 그 끝자락의 벼랑 끝에서 

 

천지간에 터트린 벚꽃 화엄경

 

그 끝에서 솟아오른 버찌 사리들

 

나는 오늘 벚꽃 터널 속을 걸으며

 

떨어지는 꽃잎 뒤의 선경禪經을 보네

 

꽃잎 너머 올라오는 새싹을 보네.

 

 

 

 

 

여름 하늘

                               고영섭

                         

 

굴참나무 위에 앉은 매미 한 마리가

온몸을 비벼대며 노래를 짜낸 뒤

우화羽化하고 남긴 허물 하나를 떨어뜨렸다

 

한 올도 얽히지 않고 짜낸 비단 옷자락

뜨거운 여름 하늘이 빚어낸 한 권의 시집

난 아직도 허물이 많아서

 

늘 가락의 올올마다 코가 걸리기만 하는데

여름 내내 매미는 나무 위에서

쉬지 않고 한 뜸 한 뜸 수를 놓았다

 

늦여름을 재촉하는 하늬바람처럼

더위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허물이 허물 되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절창을.

 
 
 
 
 
 
 

나한

 - 영월 창령사 오백나한상*

 

                                                고영섭                    

 

 

학교의 졸업장도 필요가 없고

 

용을 썼던 성적표도 필요가 없네

 

어떻게 살아야 저 표정 나올까

 

무엇을 알아야 저 웃음 나올까

 

기쁨도 노함도 뛰어넘고서

 

슬픔도 즐거움도 뛰어넘고서

 

좀 배웠단 먹물 빼고 또 빼어버린

 

좀 안다는 우쭐 놓고 또 내려놓은

 

, 비울 것 다 비워낸 사내가 있다

 

저 닦을 것 다 닦아낸 사내가 있다.

 

 

 

 

* 2001년에 강원도 영월 창령사(蒼嶺寺)지에서 대부분 목이 잘린 채 발견된 500나한상이 2018년의 춘천국립박물관 전시에 이어 2019년의 용산국립박물관 전시를 마쳤다. 영천 거조암 영산전에 모셔진 오백나한상의 자유로운 표정과 달리 깊은 미소와 침묵의 표정을 보여주었다.

 

 

 

 

 

 

시의 날을 기리는 노래
- 111일은 시의 날*
                                     고영섭
                                   
                              

말로도 글로도 설득 안 될 때

울림이 큰 시 한 편을 전달해 보라

덮인 맘을 열고 막힌 위를 확 뚫는

시는 내 마음의 우주 육체의 개벽

너와 나 사이를 열어주는 생명선

우리와 그들을 아우르는 치유제

끝내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을 때

비로소 터져나오는 사자후 노래

, 오늘은 내가 누군지 물어보는 날

생사가 또 무엇인지 돌아보는 날.




* 매년 111일은 세계 최초로 제정된 시의 날이자 시인의 날이다. 한국은 언어의 곳간이자 언어의 사원인 시를 기리는 곳이라는 점에서 세계 정신사의 첨단에 서 있는 나라이며, 노래 중의 노래요, 가사 중의 가사인 시를 쓰는 시인은 사람 중의 사람이자 가인 중의 가인이다. 한국어는 그것을 만든 주체와 원리 그리고 그 안에 투영된 철학이 분명한 언어이며 한국시는 근세 이래 이러한 언어로 창작되어 왔다. 한국 시의 날 제정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는 파블로 네루다의 임종일인 1999321일을 기념해 시의 날로 정해 두고 있다. 유네스코는 2004318일을 세계 시의 날로 선포하여 기려오고 있다.

 
 
 
 
 
 

태산에 올라보니

 

                               고영섭

                       



공자가 태산의 첨노대*에서

하늘 아래 노나라를 내려봤더니

천하가 개미처럼 작았다지만

천하는 작지 않고 내가 작았네

미세먼지 사이에서 들것을 지듯

쌀 한 톨 밥풀 하나 물고 끌면서

무위로 쌓아가는 개미의 성채

세상에서 가장 큰 개미집 우주

, 개미가 빚어내는 인간세상이

가장 큰 저택임을 언제 알까나.

 



* 태산: 동이족이 세운 하나라와 은나라의 무대였던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 인근의 태안에 자리한 태산(1545미터)은 예로부터 동악태산(東岳泰山), 남악형산(南嶽衡山), 중악숭산(中嶽崇山), 서악화산(西嶽華山), 북악항산(北嶽恒山) 등 오악의 지존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의 옥황봉은 진 시황제, 전한 무제, 후한 광무제 등이 첨하를 평정하고 하늘에 고하는 봉선의식을 거행한 곳이다.  일찍이 동이의 후예인 공자가 이곳에 올라 노나라를 내려다보고 "천하가 작다"고 한 곳에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곳 태산 남천문으로 행차해 머문 행궁이 복원되어 있다. 나는 201997일에 산동대학과 동국대학 불교대학 간의 학술대회(9.5~9.8)를 마치고 이곳에 올라보았다. 조선 초기의 문인 봉래 양사언(1517~1584)이 지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고 읊은 시조 「태산가」가 떠올랐다.

 
 
 
 
 
 

 깨다

 

                          고영섭

 

               

책장 안에서 보일 듯 말 듯 숨어서 있는

 

빛바랜 깨침 연구서 한 권 꺼내려다가

 

책장 끝 턱에 걸쳐져 있던 하얀 꽃 하나

 

땅에 떨어져 깨지는 순간 콕 찾았나니

 

껍질 깨지고 비늘 떨어진 뒤 활짝 핀 꽃

 

파편 속에서 막 끄집어낸 환한 시 한 편.

 

 
 
 
 


- 포정(庖丁)의 몰입
                           
                                    고영섭



내 몸이 모르는 일을 나는 했네

난타의 박자처럼 춤추는 팔짓
이것은 기술을 넘어서는 것
내가 따르는 것은 다만 도일 뿐

머리를 올릴 때 보이던 소는
삼년이 지나자 보이지 않았네
이제는 정신으로 소를 대할 뿐
내게는 뼈들 사이의 결만 보이네

내 감각은 모두 쉬고 팔만 저절로
하늘이 낸 결들 따라 춤사위 추며
나는 단지 결 사이에 칼을 대일 뿐
정신이 가는 대로 다만 움직일 뿐!

내 몸이 모르는 일을 나는 또 했네
난 문혜왕을 위해서 춤을 췄지만
그대는 내 움직임을 볼 수 없었을 뿐
내 몸의 일부 같지 않은 오른 팔.

 


 

* 포정해우(庖丁解牛): 푸줏간의 백정으로 일하던 포정이 문혜왕(文惠王)을 위해 소를 잡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를 본 문혜왕이 감탄하며 어떻게 그런 경지에 올랐는지 물었다. 포정이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소를 잡는 것에 대해 해명하자 『장자』가 이러한 고사를 담았다.

 

  

 

 

악의 꽃

 

                             고영섭

 

코로나 파시즘이 창궐하면서

 

코로나 정치학이 번져나가네

 

신민을 죽였던 옛 통치 권력

 

시민을 살리는 현 통치 권력

 

권력에 길들여지는 내 몸과 마음

 

꺼풀만 남아가는 인간의 자유

 

복면을 쓴 빅브라더 생체권력이

 

실정을 덮고 민주를 파괴하는데

 

아아, 악의 꽃은 언제 져버리는가

 

민주의 열매는 언제 맺으려는가.

 

 

 

 

 

만주별곡

 

                                      고 영 섭

 

 

요하수나 흑룡강수를 넘나드는 이 많은 하늘들은 어떻게 생겨난 것들인가

저 고조선의 하늘, 부여의 하늘, 고구려의 하늘, 발해의 하늘들은

어느 누가 바라보았던 하늘들인가

, 어느 나라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가 이도곤 넉넉한 곳이 있었던가

일곱 여덟이나 되는 우리 아이들의 가슴을 모두 열어놓아도

이 무성함을 다 마실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긴 이별가가 세상에 또 있던가

이렇게 긴 이별가를 들은 이가 세상에 또 있던가

즈믄 해를 앉아서 바라만 보아왔던 우리들은 철부지,

생각하면서도 생각하면서도 열어 젖지 못하는 그리움의 문() !

이 문으로 그려온 그리움의 누리엔

백제, 신라, 고려, 조선, 한국의 하늘들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 땅이 몹시도 젊은 정기를 가지고 있었을 때

우리들의 마음은 사뭇 넓었고 눈은 높았었다

매양 개나리 저고리 진달래 치마 즐겨 입던 우리들은

쑥이나 마늘을 뜯고 심던 그 거친 손으로

하늘을 젓고 땅을 저었다

온몸은 가벼워서 가무도 굿거리도 성주풀이도

춤사위를 그리면서 신명이 났었던 것이다

대륙아 !

이 영산의 천지에서 갈려나가는 수 백 수천 갈래의 문명의 가지들이

저 비옥의 옥토 !

저 풍성한 토양을 만드는 것처럼,

저렇게 두루의 하늘을 넘나들게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가슴 속에 맺혀 풀어지지 않고 오래가는 것은 바이 없었다

이보다도 우리들의 마음 속을 사무치게 하는 것은 바이 없었다

대륙아 ……

이것을 우리의 과거나 아득한 선대의 일로만 돌릴 것이냐

우리들 한 때의 아득한 추억이나 동경으로만 간직할 것이냐

이 땅의 고전 『춘향전』에 나오는 열녀의 수절같이

잘 참고 이겨내는 우리들의 심성을

대륙아 !

대륙아 !

대륙의 하늘아 !

바다나 육지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이

수 백 왕조나 수 백 민족의 흥망을 보아왔던 너희들은

 

이 땅의 땀내음, 피내음, 흙내음을 알리라! 알리라!

진달래꽃 개나리꽃이 피어낸 슬픔의 힘이

매서운 삭풍도 이겨내었다

천 길 깊은 강물이라도 메우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천 길 높은 산맥이라도 헤치고 나아가 만나야 할 우리,

우리들의 그리움을 밀어내는 왼갖 북풍 한파도

개나리 진달래 향기로 스러뜨리고,

인제는

우리 어린 것들의 개나리 진달래 노래 소리 들리는 고장되도록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만 한다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만 한다

노래는 노래는 끝나야만 한다.

 

 

고영섭 시인 약력

 

1989년 『시혁명』, 1995년 『시천지』로 작품활동 시작. 1998~1999년 월간 『문학과 창작』 추천 완료. 시집 『몸이라는 화두』, 『흐르는 물의 선정』, 『황금똥에 대한 삼매』, 『바람과 달빛 아래 흘러간 시』, 『사랑의 지도』, 『시절인연』(근간). 평론집 『한 젊은 문학자의 초상』. 21회 현대불교문학상(2016), 16회 한국시문학상(2016) 수상. 『시와세계』(2016) 문학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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